저는 평소에 회화 쪽이 제가 하는 일(주로 웹 개발 전반)이랑 많이 유사하다고 생각해오곤 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무엇인지 개발자나 비개발자가 소통을 시작하는 가벼운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취지로 쓴 글이니 독자분들께 예술과 개발의 미묘한 연결고리를 머리 속에 만들어 드린다면 이 글은 대성공일겁니다.


저는 르네상스 무렵과 19세기 인상파 화가 일부의 그림들을 좋아 합니다.
이 무렵의 그림들은 다양한 은유나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라파엘로의 걸작 중 하나인 "아테네 학당"을 다뤄보겠습니다.

773px-_The_School_of_Athens__by_Raffaello_Sanzio_da_Urbino
링크로 가서 보시면 그림 속 인물들과 조형물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은 라파엘로가 율리우스 2세 교황에게
의뢰받아 서명의 방이라 불리우는 방에 네가지 테마의 벽화를 그렸습니다.

인간의 4가지 지식: 신학, 철학, 법학, 시학(예술)

그 중에서 이번 글에서 다룰 아테네 학당은 철학을 의미합니다.


개발자의 시선 1. 이스터 에그? + 어쩌면 (소심한) 반항아

이 시기 유명화가들은 작품 속에 서명 또는 대담하게 본인을 등장 시킵니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 속에서 유일하게 관객들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림 속 우측에 등장합니다.

pic-8-self

그리고 그 바로 옆에 희끗한 수염 가득한 아저씨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 또는 자라투스트라입니다. 뒤통수만 나온 아저씨는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 입니다.

이 그림이 후세에 전사 교황 이미지(직접 군을 이끌고 참전도 했다고 합니다.)인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만들어졌단 걸 떠올려보면 상당히 도전적인 행동입니다.

정리하자면 그림 속 세상에서 실제 카톨릭이 싫어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실제 세상 속 방에 드나드는 카톨릭 신자일 사람들을 보고 있는 인물이 라파엘로 본인입니다.

더해서 그림 속 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은 라파엘로의 은인이나 지인들이 모델입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까메오 같은 걸 떠올리게 합니다.
(그림 속에 숨겨진 이야기는 너무 많은 관계로 아래 참고링크에서 하나 씩 챙겨보시길 권장합니다.)

마찬가지로 종종 개발자들은 주석이나 프로그램 상에 다양한 그들만의 농담거리나 이스터에그를 남겨 놓곤 합니다. 구글의 이스터에그


개발자의 시선 2. 트렌드(대상과 기법)의 변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은 신을 다루던 전과 달리 인간을 주된 관심사로 옮겨두기 시작하며 서서히 실제 세상과 인간을 표현하는 열망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의 투자는 그전까진 보통 "종교나 왕족"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신성함"과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서 "인체 비율"이 무시되거나 "원근법"이 무시되는 식이었습니다.
마치 이집트 시대 벽화를 보면 파라오는 거대하고 노예들은 작게 그려지듯 말이지요.

800px-Sandro_Botticelli_-The_Virgin_and_Child-The_Madonna_of_the_Book-_-_Google_Art_Project

대표적인 예로 대부분의 그림에서 묘사되는 아기예수는 아기임에도 이목구비와 신체 비례가 실제랑은 다릅니다. 팔다리가 더 짧고 얼굴이 더 컸어야 합니다.
잠깐 사담이지만 마리아는 동정녀이기 때문에 가슴이 덜 표현 되었습니다.(정말?!)
당시에는 이렇게 그림 속에서 다양한 의미와 이유를 지식이 있어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영원히 멈춰 있는 TV를 본다고 생각하면 그 TV가 오래 질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숨은 메시지가 있어야 했던 겁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예술에서 표현코자 하던 주요 대상들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상업이 성장하여 귀족과 상인들이 예술의 주요 후원자가 됩니다.
초상화와 그들의 가치관을 상징하는 그림들을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적 색채만 가득한 그림을 집에 벽화나 그림으로 걸어두면 일상 생활이 재미가 없었을 뿐더러, 예수님과 교황님보다 자기가 더 잘났다는 느낌의 그림을 그리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을테니깐요.

아무튼 그 무렵. 인본주의적 사고(휴머니즘) 바탕으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그간 찬밥신세로 전해오던 현실적인 묘사를 위한 테크닉에 눈을 돌리게 해줬습니다.
(※ 르네상스 시대의 최대의 업적은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휴머니즘" 입니다.)

저는 이 시기의 변화가 최근 수 년간 지속되어 온 신앙적인 데이터 관점(DB에 데이터 꽂히면 되는거야)에서 현실적인 사용자 이벤트 관점(재고 100개인데 십만명 동시접속해서 100명한테만 팔고 나머지는 접근 오류 보면 그게 성공적인가?)으로의 전체 패러다임 변화와 유사하다고 여깁니다.


개발자의 시선 3. 경험 바탕의 관습적 레이아웃 + (레이어와 z-index)

아테네 학당의 그림은 자세히 보면 오늘날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듯 여러개의 계층(layer)으로 화면 배치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걸 UI 레이아웃으로 최대한 심플하게 풀어서 본다면 좌우로 나누고 최전방, 중앙, 배경 과 같은 레이어로도 나눠서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즉, 2 * 3의 여섯개의 덩어리 공간으로요.

예술작품이나 각종 UI를 평가하는 관객의 눈은 모든게 합쳐진 형태를 바라보지만,
실제로 구상을 하는 예술가나 개발자의 상황에서는 구상 중의 모호한 전체 윤곽을 바탕으로 부분적인 요소들의 세부사항까지 수 차례 고민하고 만들고 바꿔가며 적용해야 합니다.

가끔 뿅하고 나오는 건 우연히 평소 많은 고민을 하던거랑 주어진 상황이 부분적으로라도 딱 하고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 있을 때 뿐입니다.

raphael-athens-left-to-right-golden-ratios-1024x794

예술에는 전반적으로 황금비라는 비율에 사람들이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건 어떤 예술가들이 "신성함"을 깨달아서 그런게 아니라 반복적 작업을 통해 봤더니 대충 이런 비율이 적당히 선호하게 된 것 뿐이지 뭐 엄청난 비밀 같은게 아닐 겁니다.

웹 UI쪽에서의 960 grid 바탕의 화면 작성 유행도 황금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개발자의 시선 4. 어디서 많이 본 작업 방식

raphael_athens_cartoon_lg

라파엘로가 당시에 그림을 그리던 시기에는 컴퓨터는 없었을테니 순전히 스케치로 승부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인물들을 작은 스케치로 나눠서 그려보기도 하고 그것들을 합쳐서 다시 그려넣어 보기도 했었습니다.

UI요소가 들어가는 개발도 르네상스 시대의 그러한 방식에서 도구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과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각종 UI를 만들 때도 그러하듯 라파엘로는 다양한 습작(mock up)을 그리고 작품을 그렸습니다.


마무리

  1. 그런데 작업 속도가 너무 늦다고 발주처인 교황님께서 클레임 걸고 다른 작업자를 붙여서 같이 진행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국내 SI판과 읍읍... (옆동네 미켈란젤로는 같은 고객님께 맞았다.)

  2. 그 뒷 이야기도 SI판이랑 비슷하지만 읍읍...

  3. 라파엘로는 요절했다.

  4. 미켈란젤로랑 라파엘로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도 그림 속에 있다.

  5. 철학을 상징하는 아테네 학당 그림 바로 맞은 편에 신학을 상징하는 그림 성체논의가 그려져 있다. (철학과 대비되는 위치의 신학.)


출처 및 참고링크:
http://projects.mcah.columbia.edu/raphael/htm/raphael_athens_draw.htm#
https://www.khanacademy.org/humanities/ap-art-history/early-europe-and-colonial-americas/renaissance-art-europe-ap/v/raphael-school-of-athens
https://en.wikipedia.org/wiki/Madonna_of_the_Book